산문 및 리뷰
이성복<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감상/이미산
기호의 순수
2016. 8. 30. 19:11
<경기신문>, 2013년 10월 3일 아침시산책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이성복
어느날 갑자기 미루나무는 뿌리째 뽑히고 선생은
생선이 되고 아이들은
발랑까지고 어떤 노래는 금지되고
어떤 사람은 수상해지고 고양이 새끼는
이빨을 드러낸다
……(중략)
어느날 갑자기 주민증을 잃고
주소와 생년월일을 까먹고 갑자기,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고
그러나 어느날 우연히 풀섶 아래
돌쩌귀를 들치면 얼마나 많은 불개미들이
고물거리며 죽은 지렁이를 갉아 먹고
얼마나 많은 하얀 개미 알들이 꿈꾸며
흙 한점 묻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이성복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문학과지성사
하루가 멀다 하고 들리는 소식은 대개 ‘어느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점점 어지간한 사건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왜 사는지 회의에 젖기도 한다. ‘어느날 우연히’ 내가 능동적으로 다
른 삶 곁으로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떤가. 나를 둘러싼 수많은 이웃들, 꽃과 나무와 개미와 개와 바람과 바위
등등. 사소할지도 모를 그들의 모습을 통해 놀랍도록 반전되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왜 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우연히 들친 돌쩌귀 아래 불개미 식구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 더구나 흙 한점 묻지 않고 가
지런히 놓인 알들, 너와 나의 꿈, 누가 삶을 지긋지긋하다 할 것인가. /이미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