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침묵>/이미산 리뷰
침묵
김명인
긴 골목길이 어스름 속으로
강물처럼 흘러가는 저녁을 지켜본다
그 착란 속으로 오랫동안 배를 저어
물살의 중심으로 나아갔지만, 강물은
금세 흐름을 바꾸어 스스로의 길을 지우고
어느덧 나는 내 소용돌이 안쪽으로 떠밀려 와 있다
그러고 보니, 낮에는 언덕 위 아카시아 숲을
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다, 어둠 속이지만
아직도 나무가 제 우듬지를 세우려고 애쓰는지
침묵의 시간을 거스르는
이 물음이 지금의 풍경 안에서 생겨나듯
상상도 창 하나의 배경으로 떠오르는 것,
창의 부분 속으로 한 사람이
어둡게 걸어왔다가 풍경 밖으로 사라지고
한동안 그쪽으로는
아무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람의 우연에 대해서 생각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 침묵은 필경 그런 것이다
나는 창 하나의 넓이만큼만 저 캄캄함을 본다
그 속에서도 바람은
안에서 불고 밖에서도 분다
분간이 안 될 정도로 길은 이미 지워졌지만
누구나 제 안에서 들끓는 길의 침묵을
울면서 들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김명인 시집『길의 침묵』( 문학과지성사, 1999)
바바하리다스에 의하면 열망은 내부로부터 폭발되어 나오는 힘이자 동경이다. 반면 욕망은 바깥쪽에 있는 것에 대한 바람이며 돈, 명예, 권력 등과 같이 결코 충족될 수 없다. 욕망은 부질없고 의미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열망으로 대체될 수 있다. 하여 내가 걸어온 문학의 길과 관여하는 욕망을 총체적으로 열망이라 부르며 이글을 시작하기로 한다.
열망이 하나의 생을 건너는 동안 그 내부와 외부는 혼동되거나 바뀌기도 한다. 내 열망의 실체를 돌아보면 이십 대는 이성적 사랑이었고 삼십 대 이후는 詩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감히 말하겠다. 사랑에 실패했듯이, 실패의 갈증으로 다시 사랑을 찾아 헤매었듯이, 시도 사랑도 내게는 해결되지 않는 열망이다.
시와진부하게 들리겠지만 칭얼거리는 내 시의 이야기를 징징거리며 들려주고 싶은 저녁이다. 지난한 시의 골목길과 짝사랑의 서글픔, 사랑은 열망이고 식지 않는 짝사랑은 형벌이다. 다가간 만큼 달아나는 가혹한 거리, 나와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려는 시의 완고함.
'긴 골목길'이 결국 나의 소용돌이로 귀착한다는 사실에 전율한다. 소용돌이 한가운데 나를 세워두고 스스로 취하고 스스로 휘둘리고 물러났다가 다시 살금살금 다가가는 이상한 놀이터. 축축함이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어스름이 강물 되어 등짝으로 흘러든다. 착란 속으로 빠져드는 혼몽처럼 지친 열망이 다시 내 안으로 미끄러진다. 한 계절이, 한 생이 문득 생소해진다. 차가운 듯 부드러운 내 강물의 감촉.
골목의 절반의 절반쯤을 남겨놓고 여름이 오고 있다. 여름은 침묵이다. 절정을 한 바퀴 돌아와 다시 절정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먼 곳으로부터 당도하는 바싹 마른 울음처럼 침묵이 버석거린다. 집중할수록 소란스럽다. 그렇다, 나의 침묵은 아직 온전하지 못하다. 경험하지 않은 완벽한 침묵이란 표표한 느낌일 뿐이다. 실체에서 분리되어진 그림자가 제 몸을 수차례 쓰다듬은 후에야 침묵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일까. 껍질로 남겨진 몸을 바라보는 침묵의 기분이란 상상만으로도 괴이한데.
난무하는 초록의 이파리들, 이미 초록이거나 덜 초록인 열망의 눈동자들, 허공을 통째로 삼킬 듯 날을 세운 광기들, 침묵을 가장한 무서운 유혹들. 사방에서 초록이 속삭인다, 멋진 계절이야.
나의 열망은 일방적이다. 쏟아지는 빛살처럼 부딪치고 부서진다. 그 황금빛 부스러기들 입속에 받아먹는다. 삼키면 다시 가득 차오르는 지속성으로 아름답다, 아름답다, 중얼거리며 골목을 걸어간다. 누군가와 인사하며 좋은 날씨군요, 그때 어느 집 개가 짖었던가. 반가움으로 다가가다 종아리를 물리기도 했던가. 아프고 달콤한 상처를 다스리다 도망 나온 그 골목을 다시 찾기도 했던가. 더러는 실없이 웃었고 대개는 재미없는 연극처럼 어서 골목이 끝나길 기다렸지. 죽을 만큼 싫어 거부하고 싶었던 길일수록 그런데 왜 산뜻하게 기억되는 걸까. 왜 오래도록 내 의식의 구들장을 따뜻하게 덥히는걸까.
골목은 침묵한다. 길은 침묵한다.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다시 푸르다 다시 쭈그러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떨어진 이파리들 모아 묵묵히 불태우는 나의 뒷모습. 태우고 태우면 그 많던 이파리들 사라지겠지. 발가벗겨진 길의 서걱거리는 울음만 남겨지겠지. 그 소리마저 사라지고 공간의 소음만이 남겨지는 그때, 내 생의 서사로 드리워질 온전한 침묵.
다시 '긴 골목길' 앞에 선다. 골목은 내게 무슨 말이든 하려했을까. 나는 정성을 다해 귀를 열어주기는 했을까. 골목의 언어를 해독했다면 때때로 엄습하는 나의 부정과 나의 모멸과 나의 위악은 덜 외로웠을까. 나는 언젠가 사라지고 내 골목도 이내 지워지고 그때 바람 한 줄기 애틋한 손길처럼 스쳐가겠지. 나는 아주 먼 곳에서 그 바람의 감촉을 느끼며 우연히 만났던 그 침묵을 해독하려 다시 끙끙거리겠지. 섬광처럼 지나가는 내밀한 느낌 하나를 내 안에 세워두고 귓불을 가만히 만지작거리겠지.
사랑 격월간 <시를하는 사람들>, 2016년 7~8월호, 김명인 시집 리바이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