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살구/이미산

기호의 순수 2014. 9. 29. 19:49

  살구

          이미산

 

 

 

  1.

  골목에서 늙은 개가 주무르는 살구를 보았어

  올려다보니 시퍼런 잎사귀에 숨어 익어가는 살구들

 

  2.

  내 긴 머리칼 들치고 혀로 내 목덜미 핥으며 그가 중얼거렸지 살구빛

이네…… 덜 익은 살구는 쓰고 잘 익은 뒷맛은 달콤해 혀는 뜨겁고 목덜

미는 살구빛일 때 태양의 중심을 통과하려는 염원이 생겨나지 부끄러운

살구가 비밀을 꿈꿀 때 혓바닥에 솟는 태양의 씨앗 같은 붉은 알갱이들

돋아나지 맛있는 살구는 언제 도착할까

  창백한 노랑이 목구멍을 찢고 나와 잘 익은 살구가 되기까지 서두르는

혀가 있다면 천천히 익혀지는 목덜미도 있어 햇살이 관여하는 심연의 흔

들림에 살구는 자주 미끄러지지만 동시에 밀어 올리는 하나의 감정은 눈

부시잖아 동시에 미간을 찡그리고 동시에 주름을 만들며 맛있는 속살이

되어가는 계절은 아름답잖아 잘 익은 살구를 기다리다 우린 끝내 목이

쉬었지 익지 않은 살구를 웃으며 삼킬 수 있다면 살구보다 크고 빨간 심

장이 주렁주렁 열릴까

 

  3.

  긴 머리칼을 자르고 언제나 노출되는 목덜미를 사랑의 측면이라 불렀

지 우리가 남기고 온 암호 같은 붉은 반점이 드리운 살구를 깨물어 보는

유월이야 살구의 속살을 혀로 감싸면 왜 슈퍼마켓 매대에서 시들어가는

기분일까 살구의 내부엔 여전히 사랑을 숭배하는 자의 기도가 남아 있어

누군가 살구잖아, 외치면 휑한 목덜미가 달아올라 신맛에 침이 고이고 미

간이 찡그려져 살구가 지고 나면 장마가 시작될 테고 햇빛 쨍쨍한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문득 먼 곳을 바라보곤 해

 

                                   계간<다시올> 2014년 가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