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이미산
살구
이미산
1.
골목에서 늙은 개가 주무르는 살구를 보았어
올려다보니 시퍼런 잎사귀에 숨어 익어가는 살구들
2.
내 긴 머리칼 들치고 혀로 내 목덜미 핥으며 그가 중얼거렸지 살구빛
이네…… 덜 익은 살구는 쓰고 잘 익은 뒷맛은 달콤해 혀는 뜨겁고 목덜
미는 살구빛일 때 태양의 중심을 통과하려는 염원이 생겨나지 부끄러운
살구가 비밀을 꿈꿀 때 혓바닥에 솟는 태양의 씨앗 같은 붉은 알갱이들
돋아나지 맛있는 살구는 언제 도착할까
창백한 노랑이 목구멍을 찢고 나와 잘 익은 살구가 되기까지 서두르는
혀가 있다면 천천히 익혀지는 목덜미도 있어 햇살이 관여하는 심연의 흔
들림에 살구는 자주 미끄러지지만 동시에 밀어 올리는 하나의 감정은 눈
부시잖아 동시에 미간을 찡그리고 동시에 주름을 만들며 맛있는 속살이
되어가는 계절은 아름답잖아 잘 익은 살구를 기다리다 우린 끝내 목이
쉬었지 익지 않은 살구를 웃으며 삼킬 수 있다면 살구보다 크고 빨간 심
장이 주렁주렁 열릴까
3.
긴 머리칼을 자르고 언제나 노출되는 목덜미를 사랑의 측면이라 불렀
지 우리가 남기고 온 암호 같은 붉은 반점이 드리운 살구를 깨물어 보는
유월이야 살구의 속살을 혀로 감싸면 왜 슈퍼마켓 매대에서 시들어가는
기분일까 살구의 내부엔 여전히 사랑을 숭배하는 자의 기도가 남아 있어
누군가 살구잖아, 외치면 휑한 목덜미가 달아올라 신맛에 침이 고이고 미
간이 찡그려져 살구가 지고 나면 장마가 시작될 테고 햇빛 쨍쨍한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문득 먼 곳을 바라보곤 해
계간<다시올> 2014년 가을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