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그때 나는 무엇을 했나 / 이미산
기호의 순수
2013. 9. 4. 19:53
그때 나는 무엇을 했나
이미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버지의 숨소리가 불러 모은 어깨들 둘러앉아 하나의 언덕이 될 때
좁은 구멍을 빠져나가기 위해 아버지는 길고 가느다란 길이 되었다 길들이 천장을 빙빙
돌아 둘러앉은 어깨에 들러붙기도 했다
인민군에 쫓길 때 날렵해서 살아남았지 처남이 죽창을 맞은 건 둔해서야, 숟가락을 당기는
아버지는 평온했던가 머리가 콕콕 쑤셔요 더 많은 뇌신이 필요해요, 젊은 아내는 늘 돌아앉아
있었던가
누군가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누군가는 벽지에 핀 꽃 속으로 걸어갔다 눈을 감고 눈이 없는
구름이 되거나 초침 위에 올라 앉아 새로운 규칙을 꿈꾸기도 했다
깃발도 담장도 풀 한 포기도 없는
거친 숨이 아버지를 넘나들었다 우리는 함께 넘어온 언덕을 등진 채 서서 각자의 행위에 몰두
하는 방식으로 이 낯선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둥그레 멈춘 아버지 입속엔
정지된 바람이 액자처럼 고여 있었다
2013년 시인협회 사화집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