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장미의 내용 / 조정인
기호의 순수
2012. 3. 26. 12:06
장미의 내용
조정인
12월의 장미를 뒤돌아보다가, 그 싸늘한 불꽃에 곁불이라도
쬘까 하다가
제 무덤을 지키는 적막한 묘지기를 본다 저 얼굴은 죽음의 안쪽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이므로 겹겹 봉인된 그의 안채는 얼마나 따뜻하겠니
죽음의 내용들이 발끝을 들고 장미를 건너간다 일테면, 골목에서 사라진
영아(嬰兒)와 참새와 비둘기와 새끼고양이와 늙은 개……
가볍고 아름다운 그것들은 홀연히 몸을 띄워 대기권 바깥
제 투명한 묘지를 찾아들었다 좀 있으면 흙의 일이 궁금해진
첫눈이 오고 아이들은 눈이다! 외칠 테지
사슴이다, 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는 왜 심장이 사라지나 흰 늑대가 되어 눈보라처럼 하늘 복판을 펄럭이나
심장을 쏟았으니 가슴이 다 패어 허공이 된 늑대, 바람이 된 울음을
암청색 밤하늘에 풀어놓나
와우우, 운석의 꼬리 같은
창자처럼 긴 울음을
돌연 천공을 찢고 내려와, 폭설에 푹푹 발이 빠지며 내 하얀 늑대가 다가오던
기척, 귓가에 붐비던 숨, 더운 혀에 관한 기억들이여 안녕
시절이여 안녕
조정인 시집, 『장미의 내용』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