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수줍은 하이에나처럼 / 이미산
기호의 순수
2012. 3. 19. 03:11
수줍은 하이에나처럼
이미산
내 그림자 다치지 않게 비껴서는 방문,
그 움직이는 벽을 통과할 때 나는 잠깐씩
그의 혀가 된다
방금 들어선 이 방이 누군가의 저 방이라는 사실은
잊기로 하자 조용히 한 방향으로 앉은 식탁의자를
다독이며 무엇이든 꼭꼭 씹어 부드러운
오늘이 되기로 하자
혀들의 만찬이 횡행하는 라디오를 끄고
바깥이 궁금해지는 혀의 발성을 연습한다
입 속의 나와, 입 밖의 내가 모르는 사이로 떠돌다
수상한 인사에 이끌린다면
어금니 사이에 낀 하루는 외롭고
먼 곳을 상상하는 혀의 밤은 뜨겁다
웅크린 뼈를 세워 확신의 문을 나서는 순간 만나는
불친절한 벽들,
맛있는 것들은 얼마나 멀리 있는 걸까
생각이 어지러울 땐 발꿈치를 끌며 걷는다
모르고 삼킨 한 숟갈의 죄악처럼 온몸이 근질거리고
누군가의 혀가 내 고백을 핥기 시작하면
그 부드러움에 취해 나는 벽들의 뜨거운 혀가 되어
이방 저 방 기웃거린다
늘 비슷한 각도로 비껴서는 방문이
내 몸을 물어뜯는 때가 있다 사나운 짐승의 등짝처럼
내가 모르는 벽의 슬픔이 있다
밤새 누군가의 방안을 들여다보는 달빛도 있다
한없이 늘어난 혓바닥 같은 그 빽빽한 벽들은
나의 내부로 향한다
현대시 2012, 4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