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시
그늘은 자란다 / 이미산
기호의 순수
2011. 12. 20. 15:22
그늘은 자란다
이미산
자작나무 잎사귀들 제 꼬리를 물고 뒤척인다
그늘의 시작은 자작나무 잎사귀 하나가
근심 속으로 햇살을 들이는 것
그늘은 몸을 동그랗게 말아 구석이 되려한다
햇살에 덮인 나무둥치처럼 따뜻해지려한다
그늘의 내부가 휑한 구멍을 열고 어린 구멍을 낳는 동안
근심은 수많은 자식을 거느린 여자처럼 희미해진다
근심이 그늘 쪽으로 천천히 건너간다
그늘의 중심에 앉으면
근심이 놓고 간 쓸쓸한 냄새를 만난다
다산의 출렁출렁한 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같은
누구나 도달해야할 바람이 태어난다는 그곳 같은
이미 떠난 사람들이 이곳을 들여다보는 무심한 눈빛 같은
그늘이 제 치마 속에서 남몰래 키운 바람을
골고루 펴서 나무의 이마에 걸어줄 때
발목을 세운 나무의 숨소리가 나직해지는 건
그늘의 방식에 흠뻑 젖었기 때문
늦은 점심을 끝낸 잎사귀들이
제 쓸쓸한 꼬리 흔들어 그늘을 풀어낸다
그늘은 지친 잎사귀를 업어 어느 골목에 내려놓는다
집집마다 한 줌 그늘이 자라기 시작한다
계간『시와 정신』2011년 겨울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