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오백년 / 정하선 (월간문학 출판부)
2003 동짓달, 서울 맹인 잔치
정하선
나는 보지 못했다. 내 앞에 가는 사람, 그 사람이 담배꽁초 밟고 가는 것을, 아침 밥상에
자반고등어 등살을 두 아이들에게만 뜯어 먹였을 손을, 그 손에 든 가방을, 오토바이가 채어가는 것
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 앞에 앉은 여자, 그 여자가 꼬고 앉은 짧은 치마 속에서 들려오는 전철 소
리를, 사내의 발자국 소리를, 아침 신문 속, 죽은 어머니와 6개월을 함께 기거했다는 어느 학생의
사진을 수백억 정치 비자금이 눈을 가려서, 찬바람이 나무껍질을 벗기고 있는 굽은 길가, 바람에
떨고 있는 목격자를 찾습니다,란 플래카드를, 며칠 전 우연히 같은 시간 해 짧은 귀갓길에 본 뺑
소니 청색 차를, 그 차번호가 내 주민번호와 같았다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플래카드 밑에 서
있는 키 작은 여자를, 그 여자가 두레박으로 퍼올린 설움을, 깊은 분노의 샘물을, 매일 저녁 산에 걸
려 있던 노을과 해를, 빌딩 속 어디로 떨어졌는지 어둠만 남기고 넘어가 버린 해를, 도시의 불빛 때
문에, 나는 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해야할 인사를 컴퓨터 속에 쑤셔 박아 버린 딸애의 로봇 얼
굴을, 나는 보지 못했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불빛에 굳어 버린 내 눈동자
정하선 시집, <한 오백년>, 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