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잉글리쉬페이션트
기호의 순수
2008. 11. 20. 20:20
[16] 잉글리쉬 페이션트(199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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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사랑을 부르는 그 곳… 햇빛 받아 반짝이는 둔덕의 능선이 요염한데, 솟았는가 싶더니 움푹 파인 골짝엔 어둠만이 흥건하다. 그렇게 끝없이 펼쳐진 사막. 여인의 풍만한 둔부 같기도 하고, 그 곳에 이르는 나른한 등 자락 같기도 한 그 곳은 격정을 부른다. 총총히 빛나는 별을 보며 길게 내뱉는 담배연기가 사라지기도 전, 사신(死神)처럼 달려온 모래바람에 모든 것이 스러지는 곳. 그 곳에 서면 어쩔 도리가 없다. 혼돈스런 열정에 몸을 내맡길 밖에. 마이클 온다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1996년 작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캐서린(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은, 그러니 그저 불가항력이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3살부터 자신을 지켜보며 어쩌면 자신보다 더 자신을 잘 알았던 남편 제프리(콜린 퍼스) 말고 다른 남자를 몸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음을, 그 뜨거운 사막 한 가운데서 알마시(랄프 파인즈)를 만나고서야 알게 됐다고. 소유하는 것도, 소유 당하는 것도 싫어한다던 자유로운 사막의 탐험가 알마시도 정신을 아득하게 하는 갈망에 몸을 던진다. 목에서 가슴으로 이어지는 곳에 움푹 파인 그녀의 쇄골 절흔, '알마시 해협'을 '내 것'이라 명명하고 수시로 소환하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매일 밤 당신을 잊으려 해도 아침이 되면 또 다시 사랑이 벅차오르더군." 무소유 대신 소유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에게 캐서린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했어요" 답하지만, 이 또한 너무 늦은 것이 된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 알갱이들이 다 빠져나갔을 때처럼. # 죽음을 부르는 그 곳… '불의 기관'인 심장 때문에 이루어진 이 '전시(戰時)의 배신'은 '권력자들이 지도 위에 멋대로 그린 경계선'들로 빚어진 전쟁의 참화 속에서 장렬하게 종료된다. 뜨거운 땅과 광활한 하늘이 부르는 열정의 명령을 좇아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서 조우한 헝가리인 백작과 영국인 부부가 꾸렸던 순수한 이상 공동체는 기한이 너무나 짧았다. 복수와 응징의 일념으로 한달음에 죽음에 도달하거나, 죽기 위해 조금 더 고통 받거나, 혹은 그저 죽기 위해 긴 고통을 감당해야 하거나, 사련(邪戀)에 주어진 선택은 냉혹하기만 한 것이다.
그래서 2차 대전 막바지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 '영국인 환자'라 불린 헝가리인 남자와 프랑스계 캐나다인 간호사 간의 만남은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만든다. 포연 속에 애인을 보낸 한나의 절망이, 자신을 진정한 친구로 대하지 않는 백인들에 대한 인도인 킵 중위(나빈 앤드류즈)의 분노 어린 슬픔과 만나 새로운 설렘으로 잦아드는 것이다. 아침이 오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는 이치처럼. 절망 따위에 무릎 꿇기엔 너무나 낙천적이며 헌신적인 한나에게 삶은 그렇게 다시 시작된다. 그녀가 사랑했거나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내는 저주 받은 징크스의 시간은, 알마시를 보내주었던 그 시간 이후 정말로 지나갔다. 그래서 한나는 "언젠가는 만나겠군요"라고 킵 중위에게 말한다. 절망에 찬 캐서린과 알마시의 마지막 비행 대신 킵 중위 혹은 다른 누구와 함께 할 희망의 비행을 그녀는 기다리는 것이다. / 박인영·영화 칼럼니스트
■ 사막=여인의 육체만큼 혹은 그보다 더 관능적이고 육감적인 사막은 '치명적인 사랑'을 위한 안성맞춤의 세팅이 된다.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사구(砂丘)를 내려다보는 숨이 멎을 것 같은 장면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어린 왕자'-생텍쥐페리가 일찍이 불러일으킨 바 있는 '사막에 대한 로망'은 원 없이 충족되는가 싶은 순간 더욱 가파른 갈망의 곡선을 탄다. 때문에, 말로써 형용되기를 거부하는 장대한 이미지들의 향연을 대형 스크린에서 보지 못한 이들에게는 치명적인 아쉬움이 남을 듯. 그렇다면, 사하라 사막의 셀자 협곡과 미데스 협곡, 사막 속의 오아시스 같은 도시 토주르의 이름과 함께 '튜니스''기블리''하르마탄' 등 갖가지 바람의 이름이라도 외워두자. ■ 전쟁 로망스=2008년 3월 18일 안타깝게도 고작 54세의 나이에 사망한 안소니 밍겔라 감독의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전쟁 로망스 영화의 전범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은 작품. 붉은 사막-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쌍엽기-모닥불과 함께 하는 사막의 밤-낯선 인종, 언어, 풍광의 이국 취향-격렬한, 그러나 금지된 사랑-전쟁의 참화와 나른한 일상의 평화…. 여기에 '세상의 금/경계'에 대한 지적(知的) 한탄까지 갖춰야할 모든 것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또한 한나를 위해 킵 중위가 마련했던 촛불의 길이라든가, 밧줄 타고 올라가 성당의 벽화를 보는 장면 등등 감동의 이벤트들도 인상적이다. 지금은 이 땅에 없는 밍겔라 감독을 추모하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말처럼 영화 속의 '우아하고 지적이고 또 아름다운 순간들'에는 배우들의 공도 지대하다. 섬세하고 예민한 정열, 혹은 위태로운 지성을 풍요롭게 정의하는 랄프 파인즈-크리스틴 스콧 토마스의 시선 교환과, 단단한 삶의 의지를 체현해낸 줄리엣 비노쉬 등, '잉글리쉬 페이션트'에는 출연 배우들의 가장 '우아하고 지적이고 또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