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계절들에게 쓴다 / 배용제

기호의 순수 2008. 10. 7. 23:01


    계절들에게 쓴다           

                                              배용제



  계절들에게 쓴다

  나는 우발적이고, 또 지속적이라고 쓴다

  일종의 수증기 같은 날들이 빠르게 증발하는 오늘도,


  열일곱 번의 우회전과 스물두 번의 좌회전을 하는 거리를 떠돌았다, 그리고 여섯 번 뒤돌아보았다

  세 번은 꼭대기들과 마주쳤고

  세 번은 꼭대기들의 그림자와 마주쳤지만 움직이는 것들은 서둘러 사라지고 있었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오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거리의 이정표를 읽는다


  나는 유일한 어떤 種이고 싶었다

  모든 종류의 방언으로 주문을 외었지만

  내 걸음은 늘 계절의 노트에 낙서처럼 쓰여질 뿐 이었다

  두려운 표정들은 어쩌다 닳은 잉크처럼 희미해지기도 했지만

  다시 뒤돌아보면 상점들 유리창에 오래된 얼룩으로 묻어 있었다

  여전히 구별되지 않았다


  나는 우발적으로 살아있고, 지속적으로 죽어간다

  수많은 오늘이 복제되는 거리,


  희미한 길 끝에서 구름은 경적소리를 질질 끌고 와서 사거리 한복판에 내팽개친다

  모퉁이마다 이상한 그림자들이 모여 썩었다

  몇 번인가 허공은 꼭대기 사이로 겨우 고개를 내밀고 숨을 몰아쉬었다

  지상의 껍질로 굳어진 콘크리트 벽 사이에서 일정한 방식의 꿈을 지닌 종족들이 끊임없이 번식했다


  끝끝내 꼭대기들은 공중의 무엇을 향해 조준하고 있었고

  나는 어둠의 일부에게 길의 행방을 다시 묻는다

  내 우발적인 오늘과, 지속적인 오늘의 계절